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명칭은
1910년 영국이 보어전쟁을 통해 현지 국가들을 모두 제압하고
남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한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남아프리카 연방의 국기. 왠일로 유니언 잭이 중앙에 박혔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민족이 바로 ‘보어인’입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살아왔던 토착민족이라기보다는,
네덜란드계가 주를 이루는 백인 민족입니다.
17세기 초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전세계로 영향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출신 사람들이 케이프 타운 근처에 케이프 식민지를 형성합니다.
이후 식민지가 성장하면서,
네덜란드 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의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합니다.
이들은 점차 현지 문화와 본토 문화가 한데 뒤섞여
독자적인 정체성을 띄게 됩니다.
이들 대부분이 고위층이 아닌 농부 출신이었기에
농부라는 의미의 네덜란드어였던 보어Boer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황제의 대관식.
남아프리카는 18세기 후반까지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영역이었다가,
1795년 나폴레옹 1세가 네덜란드를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결국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가 영국에 몰락하면서,
1814년 케이프 식민지가 영국에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영국 본토와 케이프 식민지 간의 문화적 거리감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당장 유럽에서는 종교의 보수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지만,
보어인들은 개혁교회 가운데서도 상당히 보수적인 축에 속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영국의 선교사들은
현지의 코이코이족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고 대우했으나,
이들을 노예 민족으로 생각했던 보어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어인들이 영국군을 제압할 만한
정치적, 군사적 역량이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했기에,
대부분의 보어인들은 케이프 식민지에서 오라녜 강 너머의 동쪽으로 떠났습니다.
물론, 오라녜 강 너머의 땅이 무주공산이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여러 현지 부족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으나,
보어인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해가며 대이동Great Trek을 감행합니다.
비록 영국군보다 약해서 떠난 보어인들이지만,
원주민들보다 훨씬 강력했기에 시간이 지나며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 동쪽에
남아프리카 공화국(트란스발 공화국), 오라녜 자유주, 나탈 공화국 등의
여러 보어인 국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이 영국을 피해서 떠났건만,
떠난지 채 50년도 되지 않아
보어인들이 국가를 세운 지역을
영국이 또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2차에 걸친 보어 전쟁을 겪으며,
1902년 5월 보어인 국가들은 전부 영국령으로 편입됩니다.
보어 전쟁을 치르면서,
보어인들에게도 점차 본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생겼습니다.
보어인들은 네덜란드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위그노, 독일 출신도 적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은 유럽이 ‘뿌리’이면서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기에,
본인들을 아프리카인Afrikaners으로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보어인과 아프리카너라는 호칭이 혼용된 채 오랫동안 사용됩니다.
보어 전쟁 이후에도 보어인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격했고,
영국 본토에서는 직접 통치보다는 간접 통치가 적절하겠다는 판단 하에
1910년 케이프 식민지와 보어인 국가들을 한데 묶어
남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하고 내정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보어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도 남아프리카 연방의 위임통치령으로 전환됩니다.
이후 남서아프리카는 나미비아로 독립해서 떨어져 나간다.
1931년 영국 의회에서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통과되면서,
영국 본토가 식민지들에게
내정을 포함한 군사권과 외교권을 넘기고자 하는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이에 1934년 남아프리카 연방 의회에서 연방 지위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남아프리카 연방은 실질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비록 독립은 했으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연합국에 가담할 때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 연방과 영국과의 사이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습니다.
정작 사이가 나빠진 사유는,
인종 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표면화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당시 다수의 백인이 참전하면서
그 경제적 빈자리를 흑인이 채우게 되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백인들은 참전 백인에 대한 우대 정책,
흑인들은 기존의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진 1948년 총선거에서
보어인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국민당이
당시 집권당이었던 연합당을 가까스로 이기면서
정국을 장악합니다.
각각의 반투스탄들은 괴뢰국가 수준의 외교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국민당 정권은
국가를 백인 국가와 흑인 국가로 분리하는 게 사회적으로 이득이라고 주장하면서,
황무지에 반투스탄이라는 흑인 거주 국가를 여러 개 만들어서
흑인들을 모조리 쫓아내기에 이릅니다.
문제는, 이러한 분리 정책이 남아프리카 연방의 사회적 기준으로도
상당히 극단적인 수준이었다는 점입니다.
인종간 성관계, 혼인 등을 원천 봉쇄하면서
기존의 혼혈 가정도 강제로 이혼당했으며,
흑인과 연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이 감옥에 가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점차 반발은 거세졌습니다.
그러나 1953년 총선에서 개리맨더링을 통해서 국민당이 주도권을 유지하고,
갖가지 꼼수로 사법부마저도 국민당 인사로 장악됩니다.
1956년 유색인의 공민권과 참정권을 박탈시키는 법마저 통과되면서
유색인들의 지지를 받던 연합당은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실질적인 국민당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작 헨드리크 페르부르트는 남아프리카가 아니라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58년, 이전까지 국민당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주도하던
헨드리크 페르부르트Hendrik Verwoerd가 새로운 연방 수상이 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는 끝모를 정점으로 향합니다.
이는 당시 세계적 추세를 완전히 거스르는 행태였습니다.
대표적 인종차별 국가였던 미국에서도
20세기 중반부터는 인종차별 철폐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남아프리카 연방의 비정상적 행보에 영국도 크게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반발한 국민당 정부는
1960년 ‘영연방 탈퇴와 공화국 선포’에 관한
국민투표를 진행합니다.
연방이 공화국이 되는 데에 찬성하시나요?
네
아니요
당시 정국은
보어인 위주의 백인 보수층과,
영국 출신 위주의 자유주의 진보세력으로
크게 양분된 상태였습니다.
보어인들은 네덜란드와 남아프리카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영국의 일부라는 개념에 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영국 출신 다수 백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투표는 찬성 52.29%으로 간신히 통과됩니다.
물론, 애초에 백인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국민투표의 결과에 따라,
1961년 5월 31일, 남아프리카 연방은
연방제와 영연방에서 모두 벗어나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새롭게 발돋움하게 됩니다.
P. S. 공화국이 되었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인종 차별 정책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국제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이후,
남서아프리카-포르투갈령 앙골라와의 전쟁에 남아공 경제가 휘청이면서,
경제 회복을 목적으로 점차 완화되다가,
1990년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면서 공식적으로 철폐됩니다.
Free Nelson Mandela
P. S. 2. 남아공이 국제 사회에서 배제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들어서야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이유는 바로 냉전이었습니다.
백인 극단주의 정권은 반공을 함께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시기는,
공교롭게 소련의 해체 시기와 맞아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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